테라인 이야기 108. 망(亡/望)

1부

웨에에에에에 앵~

공습경보가 울린다. 움직임이 바빠졌다. 저장고에 있던 BTC를 풀고 UST를 주워야 한다. 구름떼 같은 전투기가 하늘을 뒤덮으며 융단폭격을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폭발음이 들리고 모든 것이 무너진다. 피가 낭자하다.

여기는 Vearth의 '테라'다. Vearth는 지구에서 자유를 찾아 떠나 온 인간들의 마음 또는 생각, 염원이 만든 메타버스 행성이다. 우리는 이 마음들을 시민이라 부르며 이 세계를 가상세계라 부른다. 여기에는 여러 종류의 나라가 있고, 이곳 테라도 그런 나라 중의 하나이다. 테라에도 시민이 있다. 테라의 시민들 중 애국심이 강한 사람을 특별히 '루나틱'이라 부른다.

나는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루나 가즈아~', '테라 가즈아~'를 외치며 자신을 루나틱이라 자랑스럽게 여기던 지난 봄, 이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이 세계에 첫발을 내 딛었기 때문이다. 현실세계에서 나는 블록체인 관련 잡지의 기자다. 테라의 시민들은 '졸업'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루나 1,000개를 가지면 졸업한다.'는 부푼 기대를 가진 사람들이 너도나도 루나를 사 모으던 시기였다. 루나가 뭔지 UST가 뭔지... 인문계 출신인 나는 머리털이 새도록 이 세계를 이해해 보려고 공부를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싸이렌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렇게 테라 시민 모두가 꿈에 부풀어 있던 시기, 7,545,000번째 블럭 쯤에서 공습이 시작된 듯 하다. 공습은 테라 나라 전체를 전멸 시키려고 작정한 듯 매섭도록 촘촘하게 파고들었다. 아비규환의 전쟁 속의 테라 시민들은 '그'는 어디있냐며 울부 짖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 모든 것은 '그'의 발명품이었고 이런 사태를 미리 준비했다하고,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한 사람 또한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테라의 수장이며 이 세계에 영향력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이제 현실세계에서는 '그'를 폰지 사기꾼쯤으로 여길 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 오기 위해서는 좁고 긴 케이블을 통과해야 한다. 현실세계를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원자의 세계라 한다면, 이곳 가상세계는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0과 1의 세계다. 나 또한 이곳에서 0과 1의 뭉치로 존재한다. 이 세계에서는 현실세계의 물리법칙을 적용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 Vearth로 들어 오는 통로는 라그랑주 L2점에 위치한 웜홀이다. 현실세계에서 신호와 암호를 입력하면 0과 1의 뭉치가 기지국, 교환기, 중계국을 거쳐 길고 좁은 케이블을 빛의 3분의 2 속도로 내달린다. 그렇게 150만 킬로미터 너머 L2점 어귀에 신호가 닿고, 다섯 박자쯤 뒤에야 웜홀이 응답하듯 열린다. 케이블이 데려다 주는 건 딱 거기까지다. 그 어귀에서 이곳까지 시공간을 접어 단숨에 잇는 것은 웜홀의 몫이다.

웜홀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우주정거장이 있다. 이들을 CEX라 부르며, 중앙화된 암호화폐 거래소를 뜻한다. 중앙화 돼 있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현실세계에 이 시스템을 소유한 주인이 존재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주인은 개인일 수도 있고 그룹일 수도 있고 심지어 나라일 수도 있다. 암튼 CEX는 현실세계의 돈과 가상세계의 돈을 스왑할 수 있는 곳이다. CEX들을 지나면 신호에 따라 Vearth의 원하는 나라로 이동할 수 있다. Vearth에는 다양한 나라들이 있다. 대표적인 나라로는 비트코인, 이더리움이 있고 이 밖에도 솔라나, 카르다노, 도지 등이 존재하며, 나는 지금까지 테라에 있다가 이 변을 당한 것이다.

테라는 지금 아비규환이다. 테라의 시민들은 예상하지 못한 공습에 살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고 다리를 절면서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탈출 우주선이 있는 공항 입구에는 테라시민들의 끝없이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나 또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허리에 어깨에 머리에 몇 자루씩의 무언가를 이고 지고 있다. 아마도 루나와 UST일 것이다. 있는 대로 모아 허겁지겁 담고 최대한 남들보다 빠르게 웜홀 주변 CEX로 날라야 한다. 조금이라도 제값을 받으려면 말이다.

다행히 금방 내 차례가 왔고 수 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우주선에 올라탔다. 만약 이더리움이나 비트코인 나라였다면 교통대란이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 테라는 교통수단이 빠르고 편리하기로 유명했다. 이 전쟁통에서도 이런 운송 시스템을 유지해 주는 벨리들에게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들은 악착같이 테라를 지켜내고자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가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리라. 물론 기회주의자도 있고 개인주의자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다.

내가 탄 우주선은 CEX로 가는 수송선이었다. 이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놓은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고 심한 욕설과 울음소리 심한 고통에 절규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주로 '그'에 관한 욕설이 오간다.

"그 xx 너무 나대더라니 XX 이럴 줄 알았어.", "내가 그 xxx 죽이고 나도 죽는다.", "사기꾼 xx 자기는 돈 다 빼돌리고 튄거 아니야?"

절망에 빠진 채 하소연 하는 사람들도 많다.

"결혼 자금을 몽땅 여기에 넣었는데 한푼도 없어. 이제 파혼이야", "아기가 태어난지 얼마 안됐는데 이것 때문에 직장을 그만 뒀어요.", "부모님 퇴직금을 앵커에 다 털어 넣었는데 어떡하죠?"

욕과 울음과 하소연 그리고 절규가 가득한 이 곳, 오른쪽 한 구석에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겨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누구시오?"

"저는 테라에 취재하러 왔다가 변을 당하고 탈출하고 있는 기자입니다."

"그래 무슨 일로 나에게..?"

"혹시 루나틱이신가요?"

"허허허. 그렇다고 볼 수 있소. 그 전에 비트맥시였긴 하지만."

"그러시군요. 잘됐네요. 저는 이번 사태가 이해가 되지 않아 묻고 싶은데 보시다시피 누구 하나 여쭤볼 사람이 없어서요. 선생님께 무례하지만 부탁드려볼까 찾아왔습니다."

노인은 주위를 둘러 보더니 숨을 크게 들이 쉬다 천천히 뱉는다.

"좋소. 대신 나도 이 사태에 대해 생각 중이긴 한데 잘 알진 못하오. 그저 필부일 뿐이니. 먼 길 말동무가 되어 준다면 고맙겠소."

"감사합니다. 말씀은 편히 해주세요."

나를 힐끗 보더니 말을 잇는다.

"그러지. 궁금한 게 뭔가?"

2부

"그러지. 궁금한 게 뭔가?"

"UST는 뭐고 루나는 뭔가요?"

"핵심을 파고 드는 질문이군."

"결론부터 말하면, 장난감이라네."

그렇게 말하고는 곁에 있던 자루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보여 주었다. UST와 LUNA다. UST는 주사위 같기도 하고 각설탕 같기도 한 정육면체의 하얀 뭉치처럼 보였고, 루나는 그보다 좀 더 매끈하고 정교한 밝은 빛을 내는 노란색 작은 구처럼 보였다.

"이게 가치가 있는 걸까요?"

"허허허... 역시 그 질문이구만. 좋은 질문이야. 앞으로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보게. 이게 이 세계를 이해하는 알파이자 오메가일테니."

"이 장난감들이 가치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네. 단 한 가지 조건을 만족한다면..."

"그게 뭔가요?"

"그건 '믿음'이라네. 시간과 공간이 바뀌어도 내 것이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이 이 장난감에 가치를 부여한다네"

"어렵네요."

그는 내 혼란스러운 눈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짓고는 이내 말을 이어간다.

"천국이 있다고 믿는가?"

"아뇨. 전... 종교가 없습니다."

"미국이 있다고 믿는가?"

"네? 그 미국 말하는 건가요? 당연히 있죠!"

"천국과 미국은 같은 거라네. 믿음의 관점에선."

이런 헛소리를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괜히 시간낭비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나틱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헛기침을 한번 하고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딱히 할일도 없다.

"좀 더 이야기 해주실 수 있나요?"

"현실이 천국인 것과 현실이 미국인 것은 큰 차이가 없다네. 즉, 지금 현실을 천국이라 생각하는 것과 지금의 미국을 이상적인 미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도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라네."

잠시 뜸을 들인 후 이어간다.

"천국은 지금 현재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앞으로 다가올 사후의 세계일 지도 모르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패권 국가이며 세계 경찰로서의 이상적인 미국은 현재 존재할지도 모르고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거라네. 다시 말하면, 다 믿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믿어지는 것이라네."

"이게 지금 사태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건가요?"

"루나가 가치가 있냐고 묻지 않았었나?"

"그렇죠. 근데 그게 미국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허허허... 내일 당장 미국이 외계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네는 미국달러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

역시 미치광이였다. 무슨 말도 안되는 가정을 하는 거지?

"만약 천국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아무도 천국에 가기 위해 시간과 돈을 쓰지 않을 것이고 오늘 이렇게 테라가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너도나도 루나를 내다 팔았을 것이네. 이 명제의 대우는 역시 참이지. 누군가는 루나를 팔지 않고 가지고 있다면 이는 테라가 망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누군가 천국에 가는데 시간과 돈을 쓰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천국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라네."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달러를 모으고 쓰는 이유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것이라 믿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 그런 믿음이 강할수록,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달러는 가치를 갖는다네. 루나도 마찬가지라네. 결국 그걸 믿는 사람의 수와 믿음의 강도가 중요한 법이지."

믿는 사람의 수와 강도. 이해가 될 듯 되지 않는다.

"그럼 UST 1개가 미국 1달러와 가치가 같다는 게 말이 되나요?"

"기자라 그런지 좋은 질문들을 많이 가지고 있군." 잠시 뜸을 들인다.

"그건 말이 안되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네."

"루나틱이라면서요. 테라가 지금까지 존재한 이유가 알고리즘 스테이블 때문이지 않았나요? 그걸 부정한다면 테라의 존재 의미가..."

"자네 말이 맞네. 테라는 스테이블에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이 맞지. 그리고 보기 좋게 망(亡)했다네. 기본부터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

"테라의 기본을 부정하시는군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그 점이 안타깝다네. 예를 들어보지. 자네 한국인이라고 했던가?" 그는 자루에서 다시 UST하나를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집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이런 큐빅 하나를 만들고 '이게 1달러와 같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글쎄요. 그 걸 뭘로 담보하나요?"

"담보라... 매우 중요한 개념이지. 하나 물어봄세. 미국 1달러의 가치는 뭘로 담보하나?"

"음... 지금은 미국 채권이 담보하고 있지 않나요?"

"미국 국채는 어떤 가치가 있길래 달러를 담보하지?"

"미국은 강력한 국가고 앞으로도 망하지 않을 거라 보기 때문에 가치를 유지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 바로 그걸세. 결국 미국이 영속할 것이라는 걸 믿는 사람의 숫자와 강도가 미국 달러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네."

"한국에서 만든 큐빅 쪼가리를 1달러와 같다고 공표하고 이걸 원화나 국채로 담보한다고 했다면... 사람들이 믿어줄까?"

"설마요..ㅋ"

"사람들이 믿어 줄지 말지 결정하기 전에 백악관에서 한국 대표를 불러 세우고는 아마도 뺨을 왕복으로 20번은 갈겼을 거네."

표현이 재밌어서 크게 웃을 뻔 한 것을 참고 노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노인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히 말을 이었다.

"그럼... 테라의 UST도 같은 상황 아닌가요?"

"그렇네. 테라는 그리고 루나는 맞을 짓을 했고 맞았을 뿐이라네."

"하지만,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의문이 여기서 시작된다네..."

그러는 사이 수송선은 CEX 중 한 곳에 도착했다. 뽀글머리를 한 남자 캐릭터가 입구에 새겨진 CEX였다. 수송선이 플랫폼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수백명의 사람들이 앞 다투어 한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구름떼같은 사람들이 이미 그 곳에 모여 있었다. 천장에 있는 팻말을 살펴보니 'LUNA/USDT','UST/USDC' 등등 LUNA와 UST가 써 있는 곳이었다.

시끌벅적 웅성웅성 구경꾼들까지 오여들어 수 많은 인파가 한 테이블에 집중하고 있다.

'천하제일 단타대회'

LUNA나 UST를 이고 지고 온 테라의 시민들은 그 테이블에 자신이 가져온 것들을 모조리 쏟아 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가격 흥정이 이뤄지고 마음이 급한 테라 시민들은 제대로 된 흥정이 불가능한 상태로 혹시나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헐값에 던져버리다시피 팔아버렸다.

노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군가 헐값을 부르자 아무런 저항없이 가져온 모든 것을 그에게 넘겨주고는 몇 푼 달러 지폐를 받아 챙기고는 뒤돌아선다.

노인이 뒤 돌아서자마자 테라 공습에 참여했던 공군 수송기가 도착했고 거래 테이블 옆에 설치됐던 컨테이너를 통해 UST를 무자비하게 쏟아냈다. 천하제일 단타대회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숏'에 배팅했던 무리들의 환호소리가 뒤돌아선 노인의 내이도에 꽂힌다. 지금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던 노인은 눈가가 촉촉해지며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고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걸음이 빨라진다. 어서 웜홀로 들어가야한다.

뒤 따르던 난 갑자기 걸음이 빨리진 노인을 불러 세운다.

"선생님... 천천히 가세요~. 아직 여쭤 볼 말씀이 많은데..."

"시간이 없다네. 할일이 많아..." 노인은 잰걸음으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웜홀을 향해 다가간다.

"다시 선생님을 뵙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흠... 그렇다면 여기로 찾아오게."

'terra10...hope'

"네. 선생님, 찾아 뵐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인은 웜홀로 빨려 들어갔고 나도 서둘로 웜홀에 들어간다. 웜홀이 단숨에 나를 L2 어귀로 뱉어내고, 거기서부터는 빛의 3분의 2 속도로 좁고 긴 케이블을 여러 개 지나 현실세계에 진입한다. 서울의 한 잡지사 책상에 앉아 있는 날 발견한다. 한참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다 정신이 들었다.

'아차 이럴때가 아니지'

노인이 던져 준 주소를 테라 파인더에 입력하고 다시 Vearth로 들어간다.

잠시 후...

3부

잠시 후...

웜홀을 지나 Vearth의 테라에 도착했다. 여전히 공습 싸이렌은 찢어질 듯 울려퍼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분주하다. 여기는 테라의 항구인 듯 하다. 항만에는 'TWD'라고 써 있는 큰 배가 정박해 있었고 사람들이 여기로 분주하게 무언가를 날라 싣고 있었다. 노인을 찾아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다 짐을 챙기고 있는 한 청년을 불러 세우고 노인의 행방을 물었다.

"혹시 'terra10...hope' 주소를 쓰는 노인분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 그 주소는 제 주소인데... 혹시 노인이라면 그 영감탱이를 찾는 건가요?"

"아는 분이세요?"

"그 노인네 쓸데없이 어디를 싸 돌아다니는지... 이거나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그런데 왜 찾으시는 건가요? 영감탱이가 뭐 잘못한 일이라도..."

"아뇨. 좀 전에 CEX 수송선에서 뵀는데 인터뷰 도중에 급하게 웜홀로 들어가 버리셔서...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블록체인 관련 잡지의 기자입니다. 테라 사태를 취재하는 도중에 선생님을 뵙게 됐고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영감탱이가 CEX를 갔나요? 중앙화 된 곳에는 얼씬도 안할 듯이 하더니 결국엔 갔나보네요. 노인네 말은 걸러 들으세요. 영... 헛소리만 늘어 놓으니. 좀 기다리면 아마 이쪽으로 올겁니다. 내가 부탁한 것도 있어서."

"아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잘 찾아와서 다행이다. 아직 궁금한 것이 많다. 시간이라도 벌어볼 겸 이 청년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해 본다.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이삿짐 박스에 서류 뭉치와 사무용품 들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가지런하게 넣고 있던 청년이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그 중 서류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사 중입니다. 이건 토지 등기권리증이구요. 이 난리가 났으니 이것들을 챙겨서 어디로든 피난을 가야 할 것 같아서요."

"어디로 가시나요?"

"저도 모릅니다. 다행히 TWD에서 배를 하나 마련해 준 덕분에 가지고 있는 자산들을 배에 싣고 있는 중이에요. 저도 이 배가 어디로 갈 지는 모릅니다. 그냥 테라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에요."

"TWD요?"

"테라에 있던 토지 개발 회사에요. 여기서 분양한 땅을 좀 사뒀는데 이 사단이 나서 다른 나라로 이주한다고 합니다. 등기권리증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나라에 가서 비슷한 땅을 줄 건가 봅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믿어봐야죠. 사실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보전해 준다니 고마울 따름이죠."

"그렇군요. 다들 테라를 떠나고 있는 건가요?"

"지금 이 아수라장이 안 보이시나요? 뭐라도 챙겨서 떠나야죠. 아... '그' 새끼만 아니었으면 이 사단이 나지 않았을텐데. 지금 '그' 자식은 뭘하고 있는건지."

"'그'라하면?"

"스테이블 머시기 '그' 놈이요. 이 전쟁의 원흉!"

며칠 전만에도 '그'는 테라 시민들이 영웅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항상 Vearth에서 큰 뉴스거리였고 이 행성의 발전과 이 세계의 이상을 실현할 기대주로 각광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 반대의 의미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그는 '영웅'에서 '원흉'이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생각에 잠긴다.

얼마가 지났을까? 고개를 들어보니 청년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청년이 있던 그 자리에 노인이 있었다. TWD호를 지긋이 바라보며 서 있는 그를 부른다.

"아!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까 봤던 그 기자님이신가? 용케 찾아왔구만."

"네. 방금 전까지 여기 있던 젊은 분 덕분에 헤매진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이 곳으로 오신다고 해서요."

"허허허... 그 놈을 만났군. 쓸데없는 소리는 안하던가?"

"하하하. 네... 그런데 그 분은 누구신가요?"

"또 다른 날세."

"네?"

"이 행성의 사람들이 가진 신기한 능력이 뭔 줄 아는가?"

"능력이요?"

"바로 분신술이라네. 여기 사람들은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지."

"그럼 그 청년은..."

"아마 저 배 안에서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겠지. 나는 저 배안에도, CEX로 가는 수송선 안에도, 그리고 포탄이 떨어지는 저 테라의 최전방 참호 속에도 존재한다네. 심지어 이 곳 테라뿐만 아니라 이더리움과 비트코인 그리고 솔라나에도 존재하고 있지. 현실세계에서 존재하는 객체로서의 나는 하나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여러 갈래로 여러 종류의 마음으로 존재할 수 있다네. 아까 본 그 놈은 나의 또 다른 페르소나인 셈이지."

노인의 말은 뭔가 쉬운 듯 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뭔지 모를 힘이 있었다. 아까 그 청년이 걸러 들으라 했지만 경청할 수밖에 없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서둘러 궁금한 점을 물어본다.

"선생님. 이 전쟁이 일어난 이유가 뭔가요? 정말 '그' 때문인가요?"

"허허허. 기자님 마음이 급하시구만. 하지만, 질문이 잘못되었네."

"사실 이걸 제일 제일 먼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됐을까요?"

"이렇게 큰 일은 한 두가지 이유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네.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수 만가지 이유가 하필 이때 조합이 된 것뿐이지. 인류는 이런 복합적인 사건을 한 두개의 이유를 들어 설명하길 좋아한다네. 그래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빨리 걸러내고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거든. 아주 오래전부터."

"원인을 파악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막는다라... 맞는 말이긴 하네. 원인을 파악해야 다음 결과를 좋게 할 수 있지. 하지만, 인류는 그리 똑똑하지 못하다네. 그저 전염병이 돌면 마녀사냥을 시작할 뿐이고 지금도 딱 그 수준이야. 과학적인 원인과 진실에 가까운 사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네. 게다가 그걸 파악할 능력도 되지 않지. 단지 내 불행을 덮어 줄 희생양이 필요할 뿐이라네.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를 위로해야 하기 때문이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게 들렸나? 난 그의 실수에 대해 관심없다네. 어떤 '기준'에서는 큰 잘못을 한 게 맞을 수도 있겠지. 그건 그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알아서 심판 할 일이네. 역사적으론 화형이든 뭐든 당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하네. 아까 수송선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보다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의문이라네."

"어떤 의문인가요?"

"이제야 제대로된 대화가 되겠군."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요란스러운 알람이 울렸다. 한참을 알림 문자에 집중하던 노인이 눈을 지긋이 감고 큰 숨을 들이마시더니 내뱉는다.

"잠시 다녀와야겠네. 같이 갈텐가?"

"괜찮으신가요?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럼 따라오게."

거의 순간이동을 하다시피 따라간 곳은 테라의 수도 '앵커'였다. 이 곳은 테라에서도 가장 피해가 심한 곳으로 아직도 융단폭격이 가해지고 있다. 곳곳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우수관 맨홀로 들어가던 굳은 피의 길을 따라 다시 새로운 피가 흘러 들어가고 있다.

노인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듯 피의 길을 따라 대공포 진지로 빠르게 이동했다. 나도 따라 달린다. 참호 안에는 이제 갓 대학생이 된 듯한 앳된 군인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새로운 피의 줄기는 이곳에서 시작됐으리라. 군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차마 이 참혹한 광경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노인은 그 학생을 보더니 이미 익숙한 듯 침착하게 숨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고 지혈을 시작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구급상자를 열고 치료를 한다. 배틀그라운드 실사판 같은 느낌이 들었다가 이내 여기가 가상세계임을 깨닫는다.

"고마워. 할배." 아무렇지 않은듯 일어선 군인이 말한다.

"잘 좀 해봐."

"옛썰~!"

웃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노인의 눈을 살핀다. 노인은 참호를 등지고 돌아 나오며 조심스럽게 검지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댄다. 눈가엔 붉은 이슬이 맺혔다.

"이게 마지막 구급상자라네."

...

"좀 안전한 곳으로 갈텐가? 자네 이더리움 주소가 있나?"

테라에 오기 전 이더리움을 여행한 적이 있다. 메타마스크를 찾는다.

"네 여기 있습니다."

"그리로 가세."

다시 순간이동을 했다. 여기는 이더리움의 도시 '리도'다. 테라에서 건너 온 많은 난민들이 입국 수속을 위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노인이 말한다.

"난 이곳에서 회계사일을 하고 있다네. 사람들의 거래 원장을 관리하는 일이지."

"Vearth에서 여러가지 일을 하시는군요."

"테라 전쟁이 나고 상당 부분의 자산을 이곳 '리도'로 옮기는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네. 입국 수속이 안될까봐 맘 졸이던 곳이기도 하지. 고맙게도 테라의 밸리들은 최선을 다해 출국을 도와줬다네. 이 곳에 안전하게 도착했을 때는 여러가지 감정이 섞여서 펑펑 울기도 했네. 난생 이렇게 운 건 처음이야."

"그랬군요."

"내가 이 행성에 온 이유가 뭔지 궁금한가? 중요하고 기본적인 질문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네."

"네. 어떤 이유이신가요?"

잠시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답을 한다.

"그건 바로 '자유'라네."

"자유라... 어렵군요."

"이 행성의 첫 국가인 비트코인을 세운 사토시의 철학은 자유에 기반한다네. 내 것이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 자유. 모든 것이 그렇듯 처음 가졌던 의미가 퇴색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엔 아직도 무한한 자유가 있다고 믿고 있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요?"

"좋은 질문이네. 자네 보스턴 차 사건에 대해 알고 있나?"

"네. 미국 독립 혁명의 상징이었던."

"맞네. 표면적인 이유는 영국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미국에 지나친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이지만, 결국 미국 독립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지."

"그 때 차 상자를 바다에 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대부분 처벌을 받았을 거네. 게다가 영국은 보스턴항을 폐쇄해 버리고 자치권을 박탈했고 주민들을 징용하면서까지 억압적인 자세를 취했지.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듯이 결국 역사는 미국의 자유에 손을 들어주었네."

"지금의 테라 사태가 미국의 독립전쟁과 같다는 말씀이신가요?"

"허허허... 뭘 그리 거창하게... 난 잘 모르네. 하지만, 뉴욕 앞바다에 여신이 들고 있는 횃불이 단지 관광상품 따위로 전락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라네."

잠시 뜸을 들이고는 다시 말을 잇는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네."

"그게 뭔가요?"

"스테이블. 테라의 상징."

"그러게요. 알고리즘 스테이블은 이제 불가능한 거겠죠?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블랙스완에 대비할 수 없다는 게 증명 되었으니."

"그렇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시점이 되었네."

"근본적인.."

"달러와 같은 가격을 같는 스테이블 코인이 이 곳 Vearth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같은 질문을 하자면, 가상세게에 현실세계의 화폐가 필요한가?"

"필요하죠. 가치를 매기려면."

"가치와 가격이 다르지만, 일단 여기서는 넘어가도록 하지. 왜 사람들은 가치를 달러로 매긴다 생각하나?"

"글쎄요. 안정적이라서?"

"아니네. '중독'됐기 때문이라네. 아마도 태어날 때부터 모든 가격을 화폐로 계산해 왔으니 그럴법도 하지. 하지만, 화페야말로 긴 기간을 두고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숫자에 불과하다네. 미래의 부채를 녹이기 위해 적절한 인플레이션이 필요하거든. 그래야 세대가 세대에게 삶을 이전할 수 있지. 사람들은 이 숫자를 가치가 있는 돈이라 믿고 그 믿음에 중독돼 있네."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 제일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질문한다.

"그게 스테이블 코인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난 스테이블 코인이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라네. 특히 이 곳 Vearth의 사람들이 '달러'의 중독에서 빠져 나오길 바란다네."

"왜죠?"

"근본적으로 어떤 것의 가격을 고정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네. 가격은 결국 교환비율이고 이것을 고정한다는 말은 공격하는 상대에게 내 패를 다 까고 도박을 하는 것과 같다네. 아마 미국이 독립 이후에도 자신의 화폐를 갖지 않고 파운드화를 페깅해 썼다면 아마 미국의 자유는 역사속에서 사라졌을 거네. 특히나 미국은 금과의 페깅을 깨고 스테이블을 포기하지 않았나. 루나를 포함한 Vearth의 모든 나라가 그런 환율의 자유를 갖길 바라네"

"불편함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독에서 벗어나는 건 힘든 일이지. 특히 LP에서 큰 불편이 있을걸세. 가격이 아닌 가치가 고정되는 어떤 값을 찾는 노력을 해야겠지. 지금은 그게 어떤 자산일지 어떤 형태일지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네. 가상세계에서 가치가 고정된 어떤 값은 아마도 이상적인 숫자와 연관될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은 모른다네. 그걸 찾을 수만 있다면 현실세계로부터 완전한 독립이 가능할 거라 믿네. 누군가는 그 값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나도 그 노력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좋겠네."

"이제 난 잠시 쉬어야겠네. 짧은기간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했어."

"아 네. 그러셔야죠. 이런 상황에서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헛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주니 내가 고맙네."

"아직 완전히 이해가 되진 않지만, 많이 배웠습니다. 선생님 건강하시고 좋은 날 다시 뵙길 바랍니다."

"그러세. 날이 추워지고 있구만. 겨울이 오려나 보네. 자네도 건강하게."

이더리움에도 한파가 찾아오고 있었다. 해는 어느덧 지고 노을이 지는가 싶더니 금새 어두워졌다. 지난 겨울 매서운 추위가 생각나는 저녁이다. 나는 노인과 헤어지고 이더리움의 수송선을 탔다. 웜홀로 빠져들어가는 순간, 텔레파시인 듯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루... 루나?

앳된 군인은 끝내 숨을 거뒀다.

찢어질 듯 울어대던 싸이렌의 결국 찢겨진 틈 사이로 달빛이 새어나와 테라의 대지에 내려 앉았다. 폐허가 된 자리, 잿빛 먼지 구덩이의 UST가 달빛을 받아 산화된다. 싹을 틔운다.

망(亡)과 망(望)이 스왑한다.